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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그니까
#1-1 옛날 이야기

파란 하늘,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책가방을 메고 할아버지에게 달려온다.

“할아버지-”
“오, 그래. 우리 손자 왔구나.”
“할아버지, 지구는 왜 둥글어요?”
“지구가 둥글다니?”

손자의 꾸밈없는 큰 눈동자와 할아버지의 세월에 녹슨 눈동자가 마주친다. 손자는 말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웠는데, 응, 옛날에는 지구가 평평했는데, 응, 지구를 둥글게 만들었대요.”
할아버지는 묻는다. “누가?”
“응,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를 둥글게 만들었대요.”
할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이다. 대답이 없다. 손자는 묻는다. “응? 할아버지, 코페르니쿠스는 왜 지구를 둥글게 만들었대요?”

할아버지는 담배연기 같은 긴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게 다 사연이 있단다.”
파란 하늘로 할아버지의 한숨이 퍼져나간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한숨을 따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옛날 옛날에, 지구는 평평했단다.”


#1-2 16세기

그리 오랜 옛날도 아니고, 불과 16세기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지구는 평평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하늘에는 뿌연 구름 같은 물과 얼음알갱이의 수면층(水面層, water surface layer)이 형성되어 있어서, 햇빛이 산란하여 지구 전체를 고르게 따뜻하게 했다.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없이, 낮과 밤도 없이, 1년 내내 지구는 살기 좋았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평등한 세계.

‘코페르니쿠스’라는 호기심 많은 청년이 있었다. 두상이 약간 길고 창백한 피부, 붉은 곱슬머리, 약간 마르지만 건장한 체격. 눈동자는 순수한 젊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언덕에서 끝없이 펼쳐진 평평한 세계를 내려 보았다.


#1-3 아버지

지평선 저 너머에는 어렴풋이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정말로 보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3살 때 코페르니쿠스를 두고 지평선 너머 ‘세계의 끝’으로 가버렸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 불과 세 살 때 일이었다.
지구가 평평하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가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흐릿해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코페르니쿠스는 아버지가 떠나버렸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왜 세계의 끝으로 간 걸까?’
코페르니쿠스는 언덕을 내려간다. 집으로 가는 오솔길 주위로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꽃이 만발하다. 16세기 유럽의 농촌.

‘세계의 끝으로 반드시 가볼꺼야.’


#1-4 삼촌, 아드린느

삼촌은 놀란 표정으로 코페르니쿠스에게 묻는다.
“세계의 끝으로 가겠다고?”
“네.” 코페르니쿠스는 짐을 챙기며 무심하게 대답한다.
“자네 미쳤나? 세계의 끝은, 끝없는 어둠의 절벽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요! 말도 안돼요. 저는 믿을 수가 없어요. 왜 다들 가보지도 않고 가지 못하게 말리는 거죠? 뭔가 비밀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도 다 이유가 있어서 세계의 끝으로 갔을 거에요. 아버지는 정말..”

코페르니쿠스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세계의 끝으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의 욕을 많이 먹었다. 어떻게 자식을 버리고 갈 수 있느냐.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애초에 인간이 안 됐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버지의 욕을 들을 때마다 억울했다. 아버지의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까지 버리면서까지도, 어머니를 죽음에까지 몰고 가면서도, 정말로 세계의 끝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진실이 저 지평선 너머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여튼 갈 거에요. 말리지 마세요.”
“코페르니쿠스.” 삼촌은 코페르니쿠스의 팔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드린느는 어떻게 할 거냐.”
“정리했어요.”
“그걸로 끝이냐?”
“끝이에요. 어차피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코페르니쿠스는 조급했다. 단지 총각 딱지를 떼고 싶은 생각 정도였다. 결국 자긴 했지만, 하고 나서도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건 이후로 아드린느와는 서먹서먹해져 버렸다. 그래서 이번에 떠나는 김에 절교를 선언했다.

“아드린느는?”
“네?”
“아드린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몰라요. 알아서 하겠죠 뭐.”
코페르니쿠스는 짐을 번쩍 들고 뒤돌아서 말했다.
“그리고 삼촌, 지금까지 키워준 건 고맙지만, 이젠 제발 참견 좀 그만 하세요. 저도 다 알아서 할 나이잖아요.”
삼촌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올테니까요, 반드시.” 코페르니쿠스는 매몰차게 나갔다.

이 모든 대화를 아드린느는 벽 뒤에서 들으며 울음소리를 참고 있었다. 조금씩 불러오는 배를 움켜쥐며.

#1-5 세계의 끝

코페르니쿠스는 여행장비를 잔뜩 짊어지고 세계의 끝으로 가고 있다. 지평선 너머로는 아직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그림자만 쫒고 있는 걸까. 걸어도 걸어도, 세계의 끝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분명히 평지인데, 가면 갈수록 몸이 점점 지면에 붙고, 이제 뒤돌아보면 완전히 절벽이다. 지면에 몸이 붙는다기보다, 평지가 점점 절벽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암벽등반 장비로 조금씩 기어가고 있다. 발을 헛디디자 돌덩이가 뒤로 데구루루 굴러간다. 뒤를 돌아보자, 까마득하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아버지가 시야에서 없어진 이유를 코페르니쿠스는 깨달았다.
세계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중력이 비스듬히 작용하고, 그래서 지면에 붙어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희망이 보였다.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 이게 심리적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중력이 세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떠나기 전에 측량을 해 본 결과, 세계의 끝은 300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하루에 30km씩 강행군을 하면 100일이 걸린다. 하지만 100일은 한참 전에 지났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이미 식량도 바닥나서 탈진 상태다.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코페르니쿠스의 손이 세계의 끝에 닿는다. 영차 하고 올라가보니, 세계의 끝은 세계의 경계선이었다. 반대쪽은 끈적끈적하고 곰팡내 나는 어두운 지면이었다.
‘어둡다. 그리고 외롭다. 여기는 어딜까.’
코페르니쿠스는 탈진해서 쓰러진다.


#2-1 주여, 기다렸나이다.

어둠. 퀘퀘하고 지저분하고, 벌레와 곰팡이가 들끓는 풍경.

그 어둠을 환기시키듯 창문을 활짝 연다. 여성의 고운 손이 커튼을 정리한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여성이 누군가를 부른다.
“찰리, 이리와 봐요. 정신이 들었어요.”
어두운 방 안에는 간간히 촛불이 켜있다.

여자가 부른 찰리라는 남자는 거대한 몸집에 약간 화가 나 있다. 그가 묻는다. “정신이 들었군. 그래, 초면에 실례지만 뭣 좀 물어보겠소.”
“그러시죠.”
“당신은 누구요?”
“나는 코페르니쿠스입니다. 세계의 끝을 넘어왔죠.”
“세계의 끝을 넘어왔다고?”
“그렇습니다.”

부부는 놀라서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다. 일순간 경계심이 무너지며 눈물을 흘린다. 부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손을 꽉 잡는다.
“주여, 기다렸나이다.”


#2-2 구세주

사람들의 입이 대화를 한다.
“빛의 절벽에서 올라왔다고?”
“그렇다니까.”
“그러면 그 예언에 나오던 구세주일까?”
“케찰코아?”
“그래, 케찰코아.”

찰리 케인즈가 군중 앞에 나섰다. 군중은 숨을 죽였다.
“여러분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신화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은 신의 저주를 받아 어둡고 더러운 지상에서 살고 있지만, 언젠가 추방당한 구세주가 빛의 절벽에서 기어 올라와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는, 그 신화 말입니다.”
찰리 케인즈는 군중을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오늘 여러분께 귀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언에서 익히 들어오던, 빛의 절벽을 타고 올라온 구세주, 케찰코아라고 알려졌죠. 코페르니쿠스 씹니다.”
박수.
“저는 여러분이 빛의 절벽이라고 부르는 지구 반대편에서 기어 올라온, 코페르니쿠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경청한다.
“지구는 반구(hemisphere, half globe) 형태입니다. 평평하고 빛으로 가득한 반구와, 여러분이 사는 둥글고 어둠으로 가득한 반구, 두 개로 나뉘어 있죠. 그 경계가 바로 세계의 끝입니다. 세계의 끝은 중력이 날카롭게 높아지는 경계면이기 때문에, 서로에게는 반대편이 절벽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끝 너머를 ‘나라카’라는 빛의 절벽이라고 부르시는 것처럼, 그 곳에서도 세계의 끝 너머를 ‘아바돈’이라는 어둠의 절벽이라고 부른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군중을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 “지구 반대편은, 여러분이 보기엔 절벽이지만, 막상 가보면 평지입니다. 어딜 가도 평평한 땅이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죠. 그리고 하늘에는 하루 종일 밝은 빛을 뿜어내는 태양이 하늘에 떠 있어요. 빛으로 가득 차 있죠.”

누군가 말을 꺼냈다. “마치 천국 같군요.”
코페르니쿠스는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렇게 따지면 이곳은 지옥이죠.”
이상하게 시비조가 섞여있는 말에 코페르니쿠스는 말이 나온 곳을 보았다. 그는 놀랍게도 자신을 구해주고, 이 자리에서 자기를 소개했던, 찰리 케인즈였다. 케인즈는 팔짱을 끼고 언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도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2-3 찰리 케인즈

“코페르니쿠스씨,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조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군요.” 찰리 케인즈는 큰 몸집에 매서운 눈초리를 가졌다. 누구라도 쉽게 주눅이 들 것 같았다. 상대를 제압하는 말투다.
“코페르니쿠스씨께서는, 빛의 절벽을 기어 올라오셨다고 했죠? 물론 3000km의 절벽을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죠. 하지만 이쪽에서는, 3000km의 절벽을 떨어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케인즈는 군중을 향해서 동의를 구했다. “즉, 지구 반대편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이쪽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이건 뭔가, 상당히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찰리 케인즈는 코페르니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그놈의 천국 같은 세계에서 살다가 지옥 같은 이곳으로 올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지옥 같은 이곳에서 평생을 썩어빠지도록 살면서 천국 같은 세계는 구경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 이거야!”
케인즈는 분노했다. “얼마나 억울한지 아십니까? 저 세계의 끝 너머에서 어스름하게 넘어오는 빛이 우리에겐 전부란 말입니다. 나도 햇빛이라는 것 한번이라도 쬐어보고 싶어요. 당신은 맨날 쬐니까 감사한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가슴이 사무치도록 억울하고 분통한 게 그놈의 햇빛이라고!”

코페르니쿠스는 케인즈의 폭력에 압도되어 충격을 받고 움찔했다. 생각해보니 미안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일단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케인즈는 말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겁니까? 어차피 당신 잘못도 아닌데. 당신이 그 천국에서 살다 온 것이 잘못입니까? 아니면 이 둥근 지구가 당신들한테만 납작한 게 당신 잘못입니까? 아니라는 거야. 애초에 지구는 둥글었어.”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었다는 말에 놀라서 수군수군 웅성댄다. 케인즈는 코페르니쿠스를 특유의 눈매로 노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구는 원래 둥글었어. 그걸 지구 안에 사는 사람들이 납작하게 만든 거야. 코페르니쿠스, 우리의 진짜 적은, 지구 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2-4 둘은 맥주를 들이켰다

코페르니쿠스는 한바탕 당한 느낌이었다. 케인즈의 격양된 감정에 압도되어,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논쟁을 하고, 결국 설득되고, 마지막에는 감격스러운 포옹으로 마무리하며, 지구 안의 사람들을 쳐부수려 함께 떠나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케인즈와 화기애애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달빛이 그윽하다.

“이봐, 코페르니쿠스, 자네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나?”
코페르니쿠스는 이젠 대놓고 반말을 하는 케인즈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어쩐지 친해진 기분으로 대답을 했다.
“아버지께서 세계의 끝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따라갔던 거죠.”
“아버지를 찾으려고?”
“네, 처음에는. 하지만 가면 갈수록 세계의 끝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하더라구요. 뭔가 숨겨진 비밀 같은 것도 있을 것 같고.”
“그 비밀이란 건, 지구 안에 가보면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지구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죠?”
“오호, 흥미가 생긴 건가? 다행이구만.”

케인즈는 자세를 고쳐 앉고 본격적으로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자네가 세계의 끝을 넘어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도 예전부터 지구 안으로 가고 싶었어. 하지만 주위의 반대도 있었고, 열심히 기틀을 잡아놓은 지금의 형편에 쉽게 떠나지도 못했지. 나에게는 계기가 필요했어. 그래서 자네를 끌어들인 걸세.”
찰리 케인즈는 코페르니쿠스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좀 미안한 점도 있지만.”
“뭘요. 저도 세계의 비밀을 풀고 싶은걸요.”
둘은 웃었다.

“지구 안으로 가는 구멍은, 북극에 있어. 여기서 두 달은 족히 걸어야 하고, 지독히 추운 곳이지.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아무것도 살지 못할 정도로 춥다네. 소변을 보면 그대로 얼어버린다고 하지. 소변줄기 그대로”
“하하.”
“게다가 지구 안으로 들어가는 빛의 구멍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다고 하네.”
“제가 생각한대로 지구가 반구 모양이라면, 그 깊이는 3000km일 겁니다.”
“자네가 어떻게 알지?”
“제가 그만큼을 기어서 올라왔으니까요.”
자신만만한 코페르니쿠스의 젊은 표정에서, 찰리 케인즈는 놀라움과 든든함을 느꼈다.

#3-1 북극으로 가다

“하아- 하아-”
하얀 입김을 뿜는다. 코페르니쿠스와 찰리 케인즈는 에스키모인의 복장을 하고, 무거운 썰매를 끌고 하얀 설원을 걷는다. 달빛이 그들을 비춰준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춥다는 북극이다. 너무 추워서 어떤 생명도 살아남지 못하는 곳. 심지어는 감기균조차 살지 못해서 아무리 추워도 감기조차 걸리지 않는, 순결하고 성스러운 곳이다. 충분히, 지구 안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을만한 곳이다.’

멀리서 빛이 새어나오는 넓은 곳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빛의 구멍,
케인즈는 방한두건을 신경질적으로 벗으며 소리쳤다. “여기서 3000km만 떨어지면 되는 건가?”
코페르니쿠스는 대답했다. “그렇죠.”
케인즈는 특유의 눈매를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내가 말했었지, 기어오르는 건 가능해도 떨어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내 말을 자네는 멋지게 깨부수는군.”
“불가능은 없어요.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정말로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길이 있으니까요.”
3000km를 죽지 않고 떨어지는 방법, 그것은 패러글라이더를 타는 것이었다.

그들은 썰매에서 거대한 패러글라이더를 등에 매고 빛의 구멍의 가장자리에 섰다. 케인즈가 말했다. “까마득하군.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어. 누구, 혹시 마지막으로 빌 사람 있나? 자네 아버지?”
코페르니쿠스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드린느..’
둘은 빛의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패러글라이더가 활짝 펼쳐지며 활강을 시작했다.


#3-2 지구 안

처음에는 밝은 빛에 적응이 안 돼서 모든 것이 새하얗게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구 표면에서 광선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각종 넝쿨식물과 열대식물과 건물들이 천정과 바닥에, 마치 박쥐가 동굴 천정에 붙어있는 것처럼 매달려 붙어 있었다. 초록색의 잎사귀 사이로 눈부신 광선이 새어나오며 정글 분위기를 냈다.

빛은 산산이 부서지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내장이 망가지는 무중력을 한참이나 체험하고, 지구 중심을 지나 지구 안의 바닥 쪽에 처박혀 그들은 몸이 크게 튕겼다. 그 반동과 지구 중심으로 작용하는 중력의 영향으로 둘의 몸은 아무 것도 없는 공간으로 튕겨져 나갔으나, 다행히도 패러글라이더가 거대한 나뭇가지에 엉켜서 떨어지지 않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뭇가지에 엉킨 패러글라이더에 매달린 코페르니쿠스와 케인즈의 발밑에는 거대한 지구 내부가 아찔하게 펼쳐졌다. 바닥 쪽에 매달린 탓에 모든 것은 거꾸로 보였다. 발밑에는 지구 안의 천정과 그 가운데로 자기들이 떨어졌던 북극의 구멍이 조그맣게, 마치 밤하늘의 달처럼 떠 있었다. 달과 반대되는 점이라면 그 구멍은 빛 가운데 조그만 어둠이라는 점이었다.

케인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제 어쩌면 좋지?”
코페르니쿠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케인즈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바라보는 곳을 보고 놀라 눈을 떼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을 한 지구 안 사람들이, 마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듯이 공중에서 천천히 움직이며, 코페르니쿠스와 케인즈를 신기한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3-3 지구 안 사람들

천사같이 맑고 순수한 외모의 지구 안 사람, 그 푸른 눈동자에 코페르니쿠스의 모습이 비친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안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밖에 사람들은, 지구 안에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옥이 어디죠?”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죠.”

금발의 곱슬머리. 남녀 구분 없이 매끄러운 피부와 유연하고 가는 몸. 약간 차가운 듯 이지적이고 조각 같은 얼굴. 푸른 눈동자. 로마 시대 토가 풍의 하늘거리는 옷을 걸치고, 공중에서 날개 짓 하듯이 옷을 날개처럼 펄럭거리면, 밀도 높은 공기와 낮은 중력으로 마치 물속을 날아다니듯 이동할 수 있다.
지구 안 사람들은 밖의 이야기를 흥미로워했다. 아이처럼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호기심어린, 그러나 약간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눈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지구 밖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어요. 그래서 땅 속에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하죠. 죽음의 고통의 땅 속의 암흑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존재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생각하던 지옥이 아니네요. 여러분들은 너무 아름다우시고, 천사 같아요.”
“천사가 뭐죠?” 갑자기 그들의 눈동자가 악마같이 번뜩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섬뜩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착한.. 일을 하는 존재에요.”
“잘 모르겠군요.” 흥미를 잃은 듯 눈동자를 거두자, 코페르니쿠스는 내심 안도했다.
‘어쩐지 무서운 사람들이야.’

북극의 구멍은, 들어올 때는 빛의 구멍이었는데, 지구 안에서 보니 어둠의 구멍이었다. 지구 안은 북극의 구멍이 있는 둥근 천정 쪽과, 그 반대편의 바닥 쪽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주로 바닥 쪽에 몰려 살며, 코페르니쿠스와 찰리 케인즈, 그리고 그들을 보러 온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강당도 이쪽에 있다.
강당은 바닥 쪽에 매달려 있다. 3층의 낮은 건물로, 위아래가 반대로 되어 있다. 천정이나 바닥이나 전부 지구 중심으로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60도를 뺑 돌아서 전부 천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편의상 천정과 바닥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바닥 쪽에 몰려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중력이 작기 때문이다. 지구 중심은 바닥 쪽에 가깝기 때문에 바닥 쪽은 중력이 매우 작아진다. (내용과 별개로, 지구 중력의 1/6인 달을 생각하면 된다. 마치 물속을 걸어 다니듯 둥실둥실 떠다니는 정도) 그래서 옷을 펄럭이며 공중에 있는 부유물과 넝쿨 등을 적절히 이용하면 마치 날아다니듯 돌아다닐 수가 있다.


#3-4 달, 지구의 반쪽

그들은 특히 달 이야기를 흥미로워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설명한다.
“저기, 여러분들이 천정이라고 부르는 곳 위에는, 어둠만이 가득한 둥근 반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보기에도 천정 쪽이 어둡네요. 태양이 없기 때문이죠.”
“태양의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달이 있어요.”
“달이 뭐죠?”
“하늘에 떠 있는 것으로, 태양보다는 어둡지만 별보다는 밝은 것이죠. 물론 태양과 비교할 수 없지만, 둥근 반구 사람들에게 하늘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주는 광원이죠.”
코페르니쿠스는 그림을 그리듯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의 모습을 묘사했다. “완전한 구를 이루면서 둥글고, 약간 노란색을 띄고..”
“지구와 똑같이 둥글죠?”
“정말 둥글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둥글죠.”
“혹시, 항상 같은 면만 보이나요?”
“네, 그렇죠.”
“그리고 때론 지구 그림자가 비치지 않나요?”
“지구 그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검고 동그란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때가 아주 드물게 있긴 해요. 그게 지구 그림자일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그 보이는 면이 이상하게 다른 별처럼 둥글게 보이지 않고, 납작하게 보이지 않나요?
“좀 그런 면도 있어요.”

그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합니다. 분명해요. 달은, 지구의 반쪽일 겁니다.”
“네?”
“당신이 말하는 달은, 지구의 반쪽이라구요.”


#3-5 둥글었던 지구

원래 지구는 둥글었다.

고대인들은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35세까지 짧아졌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자, 인류는 특단의 대책을 필요로 했다.
이때 한 고대 문서가 발견이 되었는데, 이 고대 문서에는 그들보다 더 옛날, 그러니까 문명이 발달하기 전으로 환경이 오염되지 않았을 때는, 인간은 무려 900세에서 천세에 달하는 수명을 누렸다고 한다. (성경의 창세기를 의미한다. 물론 성경이나 창세기는 극 중에 등장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뉘앙스로만 참고하는 정도) 인류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꾸준히 수명이 줄어왔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공해는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공으로 아무런 공해와 변종 바이러스와 환경 호르몬이 없는 순수한 지구 안에 깨끗하고 순결한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입구는 초저온으로 바이러스조차 살지 못하게 살균하고, 빛은 광섬유로 들여오고, 지열을 이용해서 발전하고, 모든 계획이 고도의 문명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이 계획만 실현되면 인류는 예전처럼 천세를 누릴 것이다.

문제는 중력이었다. 지구 안을 파고들어도 중력의 방향은 지구 중심으로만 작용했다. 아무리 해도 역전할 수 없었다. 그러면 지구 안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사는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떨어졌다가는 몇 천 킬로미터를 지구 중심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연구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특단의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지구를 반쪽 내는 것이었다. 지구를 반으로 쪼개면, 평평한 면이 생긴다. 그러면 지구의 무게중심(모멘트)이 평평한 면 쪽으로 가깝게 치우친다. 그러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중력이 크게 줄어들어서 마치 물속을 유영하듯, 공기 중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된다.

지구 안 사람은 말했다. “저희도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이야기지만, 대규모의 계획이었던 건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의 계획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지구는 반으로 쪼개졌다. 그 중 반은 지구가 되고, 반은 달이 되었다. 지구와 달은 비대칭의 반구 모양이 되었고,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자전을 멈췄다. 이 후로 낮과 밤이 사라졌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안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지구가 자전을 했다는 얘기군요. 이 거대한 땅덩어리가 스스로 회전을 하다니,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 원래는 낮과 밤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도 낮과 밤이 없다고 하기는 곤란하죠. 한쪽 면에는 끝없는 낮이 계속되고, 다른 쪽 면에는 끝없는 밤이 계속되니까요.”


#3-6 이기적인 사람들

케인즈는 특유의 노려보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부 지구 안에 살아야 할 텐데, 지구 밖에 남은 사람들은 뭡니까?”
천사같이 아름다운 지구 안 사람은 대답했다. “지구 안에는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구 안 사람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완벽한 비례와 뛰어난 유전형질, 아름다운 몸이었다. 최고의 조건과 완벽한 환경에서 지구 안 사람은 천세를 누리며 살고 있다. 지구 안 사람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인간의 수명을 한계까지 연장하기 위해서 지구 안에 순결한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 안에는 마찬가지로 순결한 인간만이 입장할 수 있었다. 많은 자본과 노력이 들었고, 잘못했다고 되돌릴 수도 없는 대규모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조금의 흠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 기준이 너무나 엄격했던 탓에, 극히 일부의 인간들만이 지구 안에서 살 수 있었다. 나머지는 지구 밖에 버려져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마치 쓰레기통에 버려지듯이, 더러운 유전자들은 죽어갔다.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만이 지금 남아있는 것이다.

지구 안 사람은 말을 이었다. “인간은 내재한 가능성을 전부 발휘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지 않습니까? 본래 천세를 다할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그 십분의 일도 채우지 못하고 죽어버리다니. 유전자를 고르고 고르면 이렇게 아름답고 정교하게 짜인 몸으로 살 수도 있는데 말이죠.” 지구 안 사람은 안쓰러운 눈길을 주었다. 아랫것을 내려보는 우월한 자의 눈이었다.

찰리 케인즈는 조금씩 늙어가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만약 그가 지구 안에서 태어났다면 아직도 어린 피부였을 텐데, 이미 그의 피부는 탄력을 잃고 주름이 지고 있었다. 케인즈는 말했다. “불공평하군요.”
지구 안 사람이 대답했다. “세상이 그렇지요.”
“당신들이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들었군요. 원래 지구는, 둥글었는데.”
케인즈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를 참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귓속말로 케인즈를 말렸으나,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케인즈는 지구 안 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네녀석, 너 같은 놈들 때문에 밖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너희가 늙는 고통을 알아? 죽는 고통을 알아?”
“케인즈!” 코페르니쿠스는 케인즈를 간신히 뜯어 말렸다.

지구 안 사람은 옷을 정리하고, 화는 나지만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나도 그게 내 탓은 아닙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고, 아시겠어요? 하지만 그게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해도, 일단 손에 들어온 특권이라면, 절대로 놓칠 생각은 없어. 좋은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좋은 인생이 있는 거고, 나쁜 세계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나쁜 인생이 있는 거야. 알았어?”
케인즈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지구 안 사람을 노려보았다. 지구 안 사람은 말이 먹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화가 났지만,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며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도, 당신들이 지구 밖에서 이곳으로 침입한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물론 당신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볼거리인 건 사실이지만, 혹시라도 순결한 이곳을 더럽힐까 두렵군요. 아 물론 위생의 문제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북극의 극저온이 충분히 살균했을 테니까요. 제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문제입니다.”
지구 안 사람은 짐승을 쳐다보듯이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인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이곳에 당신들의 더러운 유전자를 우리에게 전염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한 아버지는 딸에게 팔을 뻗어 보호했다. 여자들은 몸을 피했다.

지구 안 사람들의 커다란 푸른 눈동자는 아이같이 순수하지만, 매의 눈처럼 날카롭고, 이기적이고, 흡사 지옥의 악마 같았다. 그들은 커다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코페르니쿠스와 찰리 케인즈를 둘러싸고 경계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인즈는 그들의 잔인함에 식은땀을 흘렸다.


#3-7 광섬유 동굴

우물 안 개구리, 그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좁은 북극의 구멍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마찬가지로 좁을 뿐이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것을 몰랐다. 하긴 들어갈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는 꽉 막힌, 폐쇄된 세계에서 살다보니 그렇게 됐겠지.

그들은 지구 밖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말이 권유지, 추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광섬유 동굴을 알려주었다. 지구 안의 바닥 쪽에 있는 광섬유 동굴은, 평평한 지구 표면의 햇빛을 지구 안으로 들여오는데 사용된다. 여기에 관리를 위해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여유가 있어서, 이곳을 이용해서 평평한 지구 표면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배웅했다. 마치 떨거지를 쫒아 보내듯, 그들의 표정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짓는 표정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그래도 가는 길이라고 지도와 식량을 주었다. 위쪽에서 떨어지는 돌 부스러기를 먹어가며 오르는 와중에, 좀 쉬어가면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찰리 케인즈가 사래가 들린 모양이다.
“크악! 켁!” 케인즈는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케인즈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식량을 조사해보자,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캡슐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 맹독이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잘 골라내고 먹으면 되겠지만, 영 밥맛이 떨어졌다. 그들은 우리를 죽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다행히도 케인즈는 튼튼해서, 불과 며칠을 괴로워하다가 결국 회복했다.
케인즈는 중얼거리며 동굴을 올라갔다. “이 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어.”
코페르니쿠스는 무표정하게 케인즈를 쳐다봤다.

#4-1 모든 것이 그대로인 마을

그들은 평평한 반구로 나왔다. 일단 그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마을, 즉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으로 갔다. 처음과 똑같은 오솔길 주위로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꽃이 만발하다. 16세기 유럽의 농촌.

코페르니쿠스는 일하고 있는 삼촌에게 말한다. “삼촌, 돌아왔어요.”
삼촌은 놀란다. 기뻐하려 하지만 애써 원망스러운 투로 말한다. “죽은 줄만 알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코페르니쿠스를 껴안는다.

찰리 케인즈는 뒤에서 묵묵히 서 있다. 그러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움직이면 따라가며 주위를 관망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좀 신경이 쓰이는 듯 말했다. “케인즈, 여기서 기다려요.”
“예.” 케인즈는 충직한 하인 같았다.

오솔길 주위로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꽃이 만발하다. 16세기 유럽의 농촌. 같은 풍경이 되풀이된다. 코페르니쿠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마을을 산책한다.
‘아차, 이 길은 아드린느 집으로 가는 길인데.’
자기도 모르게 발 가는대로 가다가 아드린느 집 앞에서야 멈춰서는 코페르니쿠스. 이미 아드린느를 보고 말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드린느도 코페르니쿠스를 보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
아드린느는 3살 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4-2 아드린느

“약속대로 돌아왔구나.”
아드린느는 3년 전의 약속을 언급했다. 물론 그 약속은 삼촌과 했던 약속으로 아드린느에게는 말한 적이 없다. 아드린느가 벽 뒤에서 몰래 들은 것이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도, 아드린느도, 3년이라는 시간이 그 사실을 잊게 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서로에게 하지 않은 말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이여서 그런 건지,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대답했다. “그래.”
아드린느는 말했다. “3년이 지났네.”
코페르니쿠스는 말했다. “벌써 그렇게 됐구나.”
아드린느는 말했다. “이 아이도 이제 3살이야.” 아드린느는 아이를 내려보고, 다시 코페르니쿠스를 보며 말했다. “니가 얘 아빠야.”

코페르니쿠스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약간 겁먹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무릎을 꿇고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자세히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코페르니쿠스. “애 이름이?”
아드린느. “갈릴레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난 니 아빠란다.”
‘아버지.’ 코페르니쿠스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화들짝 놀란다.
지금까지 뒷모습만 떠오르고,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아버지는 무척 코페르니쿠스를 닮았다.
아들과, 자신과, 아버지. 아버지가 3살 때 자신을 버리고 갔던 것처럼, 이제 코페르니쿠스도 3살 난 아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 이제야 코페르니쿠스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코페르니쿠스. “잘 키워줘.”
아드린느. “가는거야?”
코페르니쿠스. “그래. 이번엔 돌아오지 않을꺼야.”
아드린느. “그럴 것 같았어, 넌.”
“미안해.”
“미안해도 소용없어. 난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난 아직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가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아드린느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구나, 아직도 넌.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사랑한다는 거짓말 정도는 해줘도 좋잖아?”
코페르니쿠스는 망설였다. 지금까지 거짓말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미안해, 못하겠어.”
“미안해도 소용없어, 사랑한다고 말해.”
“그건 거짓말이야.”
“상관없으니까, 빨리.”
코페르니쿠스는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드린느는 말했다. “매정하구나, 넌.”
“그런가봐.”
“그래, 넌 내가 없어도 잘 살겠지. 때론 나를 생각하거나, 니 아들을 생각하거나 하는 정도로 괜찮겠지. 하지만 난 달라. 애 키우는 것도 진저리나고, 이젠 결혼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렇게 죽은 줄만 알았던 네가 돌아왔는데, 내가 쉽게 놔줄 것 같아? 절대로 못 놔줘.”
아드린느는 코페르니쿠스에게 매달렸다. “가지마.”
“놔, 이거”
“못놔.”
“놔!”
“못놔!”
코페르니쿠스는 온 힘을 다해서 아드린느를 떼어내고, 뺨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아드린느의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코페르니쿠스도 놀랐다.

코페르니쿠스는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는 도망쳤다.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풍경. 오솔길 주위로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다. 꽃이 만발하다. 16세기 유럽의 농촌. 오솔길을 코페르니쿠스는 걷는다.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아름답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한적하게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나고, 평화롭고, 조용하다.
이렇게 모든 것이 그대로 아름다운데,
왜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거지?
코페르니쿠스는 운다.
아름다운,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을 걸으며, 걸음걸이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상적인 걸음으로, 코페르니쿠스는 슬퍼한다.


#4-3 출가

삼촌, 코페르니쿠스, 찰리 케인즈가 둘러앉았다.
삼촌이 말했다. “너도 이제 그만 정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결혼도 하고, 애도 키워야지.”
코페르니쿠스는 말했다. “안돼요. 전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요.”
“할 일? 세계의 끝도 가봤고. 그 너머 지구 반대편에, 지구 안까지 들어갔다 왔는데, 또 뭐 할 일이 있나? 아버지를 못 찾아서 그런가? 이제 그만 둘 때도 됐잖아, 이 사람아.”
“지구를 구원해야 해요.”
“뭐? 하하. 지구를 구원해?”
“지구는 고통 받고 있어요. 지구를 원래대로 둥글게 만들어야 해요.”
“자네 그게 말이 된다고 보나?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자네가, 지구를 구하겠다고? 자네가 아직 젊어서 그래. 젊은 혈기에 겉멋이 들어서 그런 거야. 이제 자네도 감정적이 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할 때가 됐잖은가.”

찰리 케인즈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잘 할 겁니다.”
삼촌은 말했다. “오호라, 자네가 바람을 넣고 있었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코페르니쿠스가 그럴 애가 아닌데 말일세. 자네가 도대체 뭔데 이렇게 순진한 애를 세상을 구원하니 마니 하는 허풍에 목숨을 걸게 만드나? 자네가 뭔데 코페르니쿠스를 이용해 먹나!”
케인즈는 ‘이용해 먹는다’는 부분에서 벌떡 일어나 삼촌을 마구 때렸다. 정말로 죽일 듯이 때렸다.
“그만해.” 코페르니쿠스는 한 마디로 케인즈를 멈췄다.

삼촌은 상처가 난 얼굴로 코페르니쿠스의 다리에 매달렸다. “코페르니쿠스, 도대체 왜 이러나. 난 그저 자네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것뿐이네. 자네가 어떻게 살든 나야 상관없지만, 자네도 그렇고, 아드린느는 어쩔 셈인가. 혼기도 놓친 데다 아이까지 딸려서, 이제 자네가 아니면 데려갈 남자도 없다네. 아드린느를 이대로 평생 노처녀로 늘게 할 셈인가? 그리고 자네도 아버지 없는 설움을 알지 않은가. 이제 자네만 생각하지 말고, 아드린느도 생각하고, 아들도 생각하고 좀 그러라고 하는 말일세. 응?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차가운 눈으로 삼촌을 내려 보았다. 코페르니쿠스의 눈은 미동도 없었다. 삼촌은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자네, 변했어.”
케인즈는 발로 삼촌의 뒤통수를 찼다. 삼촌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무섭게 소리쳤다. “케인즈! 그만하라고 말했다!”
케인즈는 깜짝 놀라 두려운 눈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쓰러진 삼촌을 내려 보며 말했다. “불쌍한 것.”

코페르니쿠스는 케인즈를 보고 말했다. “하는 수 없지, 가자.”
막 가려고 하는데, 시선의 반대편에서 아드린느와 한손에 아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든 광경을 듣고 보았다. 아이는 도전적인 눈으로 코페르니쿠스를 바라보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애써 태연히 갈 길을 갔다. 찰리 케인즈는 당황하며 뒤를 따랐다.
무표정한 코페르니쿠스. 성큼성큼 걷는다. 가슴에 금이 간다. 컷이 유리처럼 깨진다. 깨진 유리 파편이 컷 아래로 떨어진다.
아드린느의 손을 잡은 아들의 시선. 아버지의 모습이 멀어져간다. 점점 흐릿해진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흐릿해질 뿐이다.


#5-1 케찰코아

그 후, 코페르니쿠스와 찰리 케인즈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세계의 진실’을 전파했다. 지구는 사실 반구 형태고, 그렇게 만든 것은 지구 안 사람들이며, 우리는 지구를 다시 둥글게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서,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았다.
일행은 예언에 나오는 구세주 ‘케찰코아’라고 불렸다. 일행의 규모는 점점 불어갔고, 자본가의 지원도 받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인재와, 막대한 자본의 뒷받침으로, 프로젝트는 착착 진행되었다.

케찰코아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차츰 종교집단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의미에서 그랬다. 그래서 나름의 계율도 만들고 여러 가지 제도를 구비했다. 그 중에 특히 코페르니쿠스가 직접 제안한 ‘3계’는 큰 인기를 끌었다.

케찰코아의 3계
1.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하라
2. 니가 진짜로 원하는 걸 해라
3. 거짓말이어도 좋으니 사랑한다고 말해라

다른 종교의 계율과 달리 케찰코아의 3계는, 묘하게 퇴폐적인 매력이 있었다. 특히 3번째 계율은 코페르니쿠스의 개인적인 사연이 담겨있기도 했다. 사연도 있고, 묘한 매력도 있고, 교주가 워낙 카리스마 있기도 해서 인기를 얻자, 심지어는 다른 종교집단에서 도용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그래서 케찰코아는 후에 다음과 같은 4번째 계율을 추가했다.

4. 이 글을 무단으로 도용하지 마라

케찰코아는 지구 밖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일으켰다. 특히 교주 코페르니쿠스의 깊은 다크서클, 암울한 카리스마가 인기가 많았다. 각 국가의 군주들은 케찰코아가 종교집단을 넘어서는 권력을 가지게 되자, 견제하는 의미에서 암살, 공권력 투입, 음해성 공작 등 갖은 방법을 다해서 케찰코아를 와해시켜려고 했지만, 찰리 케인즈라는 막강한 심복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찰리 케인즈는 한 술 더 떠서 케찰코아를 공격한 이들을 잔인하게 제거했다. 이미 그의 힘은 군대로도 제압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5-2 물풍선 프로젝트

케찰코아의 수뇌부,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자리. 지구를 둥글게 만들 방법을 회의하고 있다.

오랜 검토 끝에 나온 계획은 ‘물풍선 프로젝트’였다.
16세기, 대기권 위에는 수면층(水面層, water surface layer)이라고 하는 물과 얼음알갱이로 된 짙은 구름 같은 층이 있었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고 태양에너지가 유입되는 방향이 고정되면서, 대기 중에 유입된 수분이 지표면으로 내려가지 않고 머물러있는 것이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물속에서 바라본 수면처럼 태양빛이 수면층에서 산란하며 온 세상에 따뜻한 햇빛을 고루 뿌려주었다. 이것은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해로운 광선, 우주 먼지, 바이러스, 태양풍 등을 차단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 수면층은 약간의 충격으로도 금방 분해되는 불안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 알갱이는 무겁고 표면장력이 강해서 쉽게 뭉쳐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여기에 충격을 주는 등의 에너지를 공급하면, 물은 일시에 응집하여 물방울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치밀한 예측결과 불과 48시간이면 전 세계의 수면층이 사라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대량의 물을 북극의 구멍으로 지구 안으로 쏟아 부으면, 지구 내부의 고열과 반응하여 수증기로 팽창하면서 지구를 둥글게 부풀릴 것이다. 그리고 남은 물은 북극의 극저온으로 얼어붙어 막힐 것이다. 즉 지구를 물풍선처럼 둥글게 부풀린다는 계획이다.
수면층의 대량의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그 중심이 북극의 구멍 한 점에 모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 방법은 미사일을 북극의 구멍 상공의 수면층에 발사하여 폭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과 고급인력이 투입되었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참혹하고 치명적인 피해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케찰코아는 전쟁도 불사해야했다.


#5-3 용서해줘

찰리 케인즈는 케찰코아의 교주, 코페르니쿠스의 방에 들어갔다.
“교주님,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미사일 개발 건입니다.”
“그래.” 코페르니쿠스는 거만한 표정으로 찰리 케인즈의 문건을 받았다.
케인즈. “무인도에서 실시했던 미사일 발사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1300여명이 죽었고, 현재 수습중입니다.”
“전부 케찰코아 신도들인가? 민간인은 없고?” 코페르니쿠스는 사무적인 눈으로 찰리 케인즈에게 물었다.
“네.”“그럼 됐어.” 코페르니쿠스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사무적인 눈을 문건으로 가져와 훑어 내렸다.

케인즈는 조금 당황했다. 삼촌의 말대로, 코페르니쿠스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1300여명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사람이 아니었다. 확실히 코페르니쿠스는 변했다.
물론 케인즈가 코페르니쿠스를 변하게 한 점도 있다. 케인즈는 처음부터 코페르니쿠스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일부러 논쟁을 했던 거고, 그래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지구를 둥글게 만드는 계획도 실은 케인즈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케인즈는 리더십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잘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자 역할을 대신 할 코페르니쿠스를 끌어들여, 그의 순수한 청년의 열정을 이용하여 계획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지금 코페르니쿠스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고향에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본인은 일체 언급이 없다. 간혹 “아드린느..”라는 모르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먼 곳을 향해 무의미하게 분노의 눈동자를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코페르니쿠스는 너무 컸다. 확고한 교주의 자리를 확립했다. 이제는 찰리 케인즈도 그의 심복, 그의 오른팔일 뿐이다. 케인즈는 이제 코페르니쿠스를 거스를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케인즈는 변명했다. “이번 실험은 실패로 끝났지만, 많은 데이터를 얻었습니다. 내년이면 분명히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겁니다.”
코페르니쿠스는 물었다. “그 계획,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나?”
“현재로서는 약 80% 정도입니다.”
“나머지 20%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나?”
“만약 실패할 경우, 지구는 물바다가 됩니다.”
“물바다?”
“네. 전 세계적으로 수백 미터 높이의 물이 차오를 겁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은 익사합니다.”
“지구 전체의 운을 건 프로젝트군.”
“그래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그 안에서 생명을 보존한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방주의 규모도 한계가 있고, 그 안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물자에도 한계가 있어서, 6개월 정도를 잡았을 때, 수용인원은 150명 선에 불과합니다. 이 인원이면 수뇌부조차도 전부 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항은 극비로 부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갑자기 지구 안 사람들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우리도 지구 안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생각했다. 물론 만약의 경우지만, 20%는 너무 커. 하지만 더 이상 실패를 감당할 여유도 없고,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할 수밖에 없어.
방주에는 누가 탈 수 있을까, 나도 탈 수 있겠고, 케인즈도 탈 수 있겠지. 하지만 아드린느도 못 탈거고, 아들도 못 탈거야.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누가 제발 날 좀 말려줘.’
‘아니야, 설령 아드린느라도, 아들이라도. 날 막을 순 없을 거야.’
코페르니쿠스는 눈물을 흘렸다. 케인즈는 당황했다.
‘미안해, 난 널 죽일꺼야. 그러니까..’
코페르니쿠스는 흐느끼며 말했다. “용서해줘..”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용서해줘.’


#6-1 실패

마침내 그놈의 빌어먹을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눈물 나게 많은 시간과 자본과 기술과 노력과 피땀이 어린, 개발팀이 보기에 징그러울 정도로 애정이 어린 미사일이 마침내 발사되었다. 개발팀은 학을 띠면서도 즐거워했다. 상황실에 미사일이 북극의 구멍에 정확히 명중하여 폭발하는 모습이 나오자, 개발팀은 환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나빠졌다. 물이 쏟아져 내리지 않았다. 파장은 천천히 지구 전체로 퍼져 갔고, 일시에 전 세계에 폭우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린 적이 없는 비였다. 홍수가 났다. 이것이 우려했던 20%의 경우, 즉 실패였다.

극히 일부의 케찰코아 주요 간부만이 비밀리에 방주에 탔고, 나머지는 익사했다. 그들은 방주 안에서 상황을 지켜봤다. 수백 미터까지 차오른 물은 다행히도 북극의 구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지구 안 사람들도 익사했을 것이다. 끝까지 차오른 물은 북극의 극저온으로 얼어붙었다. 마치 뚜껑이 막힌 것처럼, 지구는 부풀기 시작했다. 대규모의 지각 변동이 있었다. 지구가 둥글어지면서, 지구는 자전을 시작했다. 낮과 밤이 생겼다.

홍수가 난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6-2 무지개

60일 밤낮이 지난 후에 그들은 방주에서 내렸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물이 찼다가 빠진 세계에는, 모두 평등하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그렇다고 되돌릴 수는 없다. 어쨌든 세상은 평등해지지 않았는가.

코페르니쿠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로운 세상에는 전에 없던 무지개가 생겨 있었다. 예전에는 태양광이 수면층에서 산란해서 무지개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필터 없이 태양광이 곧바로 따갑게 내리쬐기 때문에 무지개가 생기는 것이다. 우주로부터 날아오는 날카로운 직사광선 아래에서, 무지개는 놀랍도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에 떠 있었다.


#7-1 문명 전파

케찰코아 사람들은, 이 재앙의 와중에도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인류에게 문명을 전파하고 다녔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인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렸는지, 그 절대악의 정체에 대해 끈질기게 물었다.

케찰코아는 내부 회의를 거쳐서, 지금의 재앙을 설명할 적당한 신화를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지 않고, 앞으로의 삶에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진실이 무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진실을 전파한다면 오히려 극약이 될 것이다. 때론, 거짓말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는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신화에서 코페르니쿠스는 구세주였다. 그는 교주를 넘어서 진짜 신이 되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자애로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리켰다. 코페르니쿠스는 수많은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말로 사람들을 구원했다.

다시 전파된 문명을 바탕으로, 인류는 다시 일어섰다. 불과 수백 년 만에 원래 문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 후로 세상을 뒤엎을만한 혁명을 보고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7-2 코페르니쿠스처럼 되고 싶다

지금까지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은 손자는 말했다.
“아, 그러니까,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지구를 둥글게 만든 거네요.”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그렇지.”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 멋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하나로 족하단다. 할아버지는 그런 난리가 또 일어나는 건 싫어.”
“하지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정말 대단하잖아요.”
“그래도 많은 사람이 고생하잖니.”
“그치만, 헤헤.”
“허허.”

할아버지는 검버섯이 돋은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자외선이 피부를 파괴하는 것이다. 예전처럼 수면층이 해로운 우주광선을 막아주던 시절에는 이런 병도 모르고 지냈을 텐데. 내가 이렇게 빨리 늙는 것도 다 코페르니쿠스 탓이려나.
“손자야, 그래도 옛날 같았으면 더 오래 살 수 있잖니.”
“그래도 지구는 둥근 게 좋아.”

코페르니쿠스는 큰 결단을 했다. 그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도 있었을 인생의 분기점을 빼앗겨버렸다. 그 대가로 나의 수명이 10분의 1로 줄더라도, 내가 어찌 코페르니쿠스를 욕할 수 있으리오. 이렇게 손자가 좋아하는데.

손자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코페르니쿠스처럼 되고 싶다!”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아무렴, 그래야지.

지구는 너희들 것이니까.



집필기간 2005년 7월 4일 ~ 24일
초안 2005년 5월 13일

제1회 부천 스토리만화 공모전 출품작
혹시라도 당선되면 저작권 문제로 삭제함
|hit:2321|200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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