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티탄(Titane, 2021)을 재미있게 보고, 감독 쥘리아 뒤크르노의 전작 로우(Raw, 2016)을 찾아 봤다. 주말에 아내와 박장대소를 하며 봤다. 아내도 나도 영화를 볼만큼 봐서 왠만한 영화는 대충 어떻게 흘러가겠다 감이 잡히는데, 이 영화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더니 생각지도 못하게 멀쩡한 결말을 냈다. 한참을 일부러 헤매다가 예정했던 도착지에 정확히 안착한 느낌이었다.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는 식인 뱀파이어가 숨겨진 혈통을 깨닫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평범한 이야긴데, 여기에 채식주의, 식인주의, 대학 신입생 신고식 폭력, 친자매 사이의 애증을 섞어서 아주 자극적으로 만들었다.
시간 순서대로 말하자면 이렇다. 어머니는 식인 뱀파이어였고,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해 아버지를 물어 뜯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점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결혼했다. 어머니는 두 딸을 낳았고, 식인 뱀파이어의 혈통이 유전될까 두려워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키운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폭력들을 마주하며 딸들은 결국 각성하고 만다. 언니는 일부러 차 사고를 일으켜 죽은 사람들을 먹었고, 여동생은 언니의 손가락을 실수로 잘랐다가(???) 그 손가락을 닭발처럼 뜯어먹으며(????) 뱀파이어임을 각성한다. 그러다가 여동생은 게이 룸메이트(?????)랑 잠자리를 가졌다가(??????) 그 게이의 허벅지를 언니와 사이좋게 뜯어먹는다.(???????) 언니는 살인죄로 감옥에 가고, 아버지는 딸에게 식인 뱀파이어의 혈통이 유전된 거라고 밝히며, 어머니에게 뜯어먹혔던 가슴의 큰 상처(?????????)를 보여주며 끝난다.
채식주의를 사회적 폭력과 연결시키는 건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2007)에서 절절하게 묘사한 바 있다. 나도 고기를 일상적으로 먹지만, 육식은 사실 상당히 폭력적이다. 가축의 사육과정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리고 한 생명의 살점과 내장을 뜯어먹는 구체적인 광경을 자세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징그럽다. 물론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대충 그냥 맛있게 먹겠지만, 안 그런 사람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이것을 대학교 수의학과에 연결해 징그러운 장면들을 보여준다. 수의학과 학생들은 신입생 신고식으로 동물의 피를 신입생들에게 뿌리고, 토끼의 생 콩팥을 먹인다. 소의 자궁에 팔을 집어넣어 인공 수정을 시키는 실습을 하고, 소의 사체를 해부한다.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마치 일상인 것처럼 차분하게 묘사된다. 보통의 호러 영화라면 깜짝 놀라야 할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나는 특히 신입생 신고식 장면이 화가 났다. 나라면 그런 부조리를 참지 않고 반항했을 것이다. 나도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가 술을 마시는데 아무도 자기와 마셔주지 않아 혼자가 되었다며 모두 강당에 집합시켜서 얼차려를 준 적이 있었다. 4학년들이 3학년들을 줄빠다치고 퇴장하고, 3학년이 2학년을, 그리고 2학년이 1학년을 하려다가 멈췄다. 1학년 과대표는 자기가 선배님들을 잘 못 챙겼다며 계속 자책을 했다. 나는 이런게 너무 싫어서 다음 날 새벽 첫 차를 타고 떠났고, 그 후로 과 모임이나 과방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처럼 부조리가 싫어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구역질이 나지만 적당히 참으며 다닐 것이다.
그러다가 이 주인공은 도저히 참지 못해 결국 뱀파이어로 각성한다. 그렇다고 그 부조리에 대해 복수하는 얘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미 뱀파이어로 각성한 언니와의 애증섞인 자매애(???)로 정상적인 뱀파이어(????)로서 안전한 살육(?????)을 배운다. 결국 그러다가 안전한 살육에도 실패하는데, 그 죄를 언니가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알고보니 엄마도 뱀파이어였고, 아빠는 그걸 감수하면서 살아간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가족애(??????)를 느끼며 끝난다.
좋은 점은 설교조로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시점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를 뻗어나갈지 가늠할 수 없다. 그렇게 정말 예상치 못한 지점까지 나아가고, 그 마지막 지점에서 의외로 평범한 결말을 내면서 더 큰 충격을 준다. 결국 평범한(???) 뱀파이어 가족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육식의 잔인함, 대학교의 내리 갈굼, 일그러진 자매애와 가족애를 보여주지만, 그렇게 무거운 주제들을 깊이 다루지 않고 맥거핀처럼 활용하며 그냥 지나가버린다. 그런 점이 영화는 대단했다.
이런 제멋대로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잘도 투자를 받았구나 싶다. 사실 영화를 만드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투자를 받는 것이다. 박찬욱도 영화 “도끼”의 투자가 마지막 단계에서 무산되서 백지화된 적이 있다. 박찬욱도 펀딩을 못 받아 영화를 못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 감독은 이렇게 이상한 시나리오를 가지고도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차기작 “티탄”도 만들었다. 두 영화 모두 인디 영화 수준이 아니다. 보통의 상업영화 수준으로 돈을 들인 것 같다. 충분한 자금으로 품질 높은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시나리오도 대중성을 위해 딱히 수정한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이 가장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