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날

바람이 부는 날이 있다. 정말 어쩌지도 못할 정도로 꼼짝도 못할 날이 있다.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게 뭐 엄청난 건 아니고 그냥 가끔가다 그런 날이 한번씩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생각이 나는대로 천천히 자세하게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런데 문득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뭔가 두고 온 것처럼, 할 얘기도 그렇게 잊어먹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남는 거라곤, 내가 뭔가 너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 뿐이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달고 살아간다. 말문이 막힌 채로 바람이 불고, 너는 나의 얘기를 기다리며,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때가 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이미 잊어버린 이야기 보따리를 쥐어 짜내며, 아무 말이라도 적당히 지어서 그 빈 공간을 채워넣으려고 했다.

“잠시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아니, 지금은 너무 늦었어. 지금 커피를 마시면 오늘 밤에 잠들지 못할 거야. 그래서 나 요즘 커피 안 마시잖아.”

간신히 짜낸 커피 생각이 퇴짜를 맞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연하게 타줄께.”

“내가 마시기 싫다고 하는데도 모르겠어?” 다시 한 번 매몰차게, 확실하게 거절을 당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부는 날이 있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이 빈 공기를 채우고 싶었다. 나는 커피 말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생각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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