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인과 도망자

환상의 여인(1942)
도망자(1993)

세계 3대 추리소설 중 하나라길래 궁금해서 환상의 여인을 보았다. 소설은 유명세에 비해 상당히 지루했지만, 마지막 트릭은 꽤 재미있었다.

어제 TV에서 우연히 옛날 영화 도망자를 봤는데, 소설 환상의 여인과 중요 트릭이 똑같았다. 오히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감옥에 갇혀 있어서 뭘 할 수가 없으니 꽤 지루했는데(물론 주인공이 갇혀있는데 내용이 진행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긴 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도망다니니까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표절까진 아니었고) 소설의 단점을 잘 보완해서 영화를 만든 것 같았다.

회사원이자 소설가인 곽재식의 소설 작법서,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에도 그런 부분이 나온다.  “망한 영화에서 이야기 소재를 얻는다.” 헌터X헌터의 작가 토가시 요시히로도 재미없는 작품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노트에 적으며 연구했다고 한다.

환상의 여인은 핵심 트릭은 좋았지만 나머지가 별로였는데, 도망자는 핵심 트릭을 유지하면서 나머지를 더 재미있게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도망자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보고 싶다.

첫째로 주인공의 아내가 일단 죽고 시작한다. 냉장고 속의 여자라고 불리는 클리셰다. 남자 작가의 작품에서 여자 캐릭터가 너무 도구적으로 쓰여서 재미가 없다. 여자를 좀 더 입체적으로 움직인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여기에 참고가 될 만한 작품으로, 홍상수 감독의 김민희 이전과 이후 영화를 들 수 있다. 홍상수도 김민희 이전까지는 여성 캐릭터들이 인형같이 딱딱하게 움직였는데, 김민희 이후로는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인다.

둘째로 결말 이후를 더 그리고 싶다. 나는 물론 영화의 결말이 매우 깔끔하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부연할 여지도 있다고 본다. 주인공은 의사로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을 다니면서 작은 범죄를 저지른다. 앰뷸런스를 훔쳐 달아난다거나, 신분증을 위조한다거나, 경찰의 지시에 불응하고, 지하철 창문을 부수고, 사람을 때리기도 한다. 이런 점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고, 벌을 받은 이후의 의사 생활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예전보다 조금 덜 고집스러워진다거나, 전에 안하던 욕을 하는 등 약간은 불량스러워졌지만 자기처럼 일이 잘 안 풀리는 사람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런 결말의 모범 사례로 나는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Identity Thief, 2013)와 더 행오버(The Hangover, 2009)를 들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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