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을 보고 펑펑 울었다. 영화 후반부에 바쁘게 달려가던 영화가 갑자기 멈추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서 그만 버튼이 눌려버렸다. 갑자기 이 영화가 재즈 음악에 대한 영화임을 부정하고, 앞의 모든 내용을 맥거핀으로 소비해버린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다. 일단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디즈니에서도 이제는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나올 때도 됐다. 그래서 흑인이 주인공이라면, 재즈 음악 영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냥 흑인 재즈 영화로 만들자니 너무 진부할 것 같으니, 지난번 “인사이드 아웃”에서 썼던 마음의 캐릭터을 영혼의 캐릭터로 바꿔서, 소울 음악이 곧 영혼의 음악이라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 내 예상은 이랬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우울증을 다루고, 죽음과 삶을 다루고, 삶의 무상함과 소중함을 다룬다. 삶은 무상한 동시에 소중하다. 그 소중함은 꿈일수도 있고, 열정일수도 있고, 소망일수도 있고, 소명일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거창한게 아니라, 그냥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일수도 있고, 짭짤하고 기름진 싸구려 피자를 먹는 것일수도 있고, 어느 가을 오후 가벼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하나가 손에 떨어지는 촉감일수도 있다. 거창할 수도 있고, 덧없을수도 있다. 하여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영혼이 발견한 것을 따르면 된다. 그것이 “제리”가 우리 영혼을 지구에 내려준 이유다.
주인공은 재즈 뮤지션이 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고, 현실은 중학교의 음악 밴드를 지도하는 교사다. 엄마는 교육 공무원이 되길 바라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뮤지션의 꿈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뉴욕의 아주 유명한 재즈 클럽인 “하프 노트”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기는데, 안타깝게도 그 직전에 맨홀에 빠져서 죽을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천국에서 부활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서 결국 재즈 공연을 성공적으로 한다. 마침내 꿈을 이룬다. 그런데 막상 꿈을 이루니까 이게 아닌 것 같다. 뭔가 놓치는 것 같다.
중학교 밴드는 너무 엉망이어서 좌절스럽다. 고작 중학생들이 잘할리가 없다. 그나마 그 중에 한 아시안 여자 학생이 트럼펫을 아주 잘 불어서 조금 의욕이 생기긴 한다. 왜 꼭 이런 영재 역할은 아시안 여자 학생이냐고 묻지 말자. 그래도 이번에는 보라색 블리치를 하진 않았으니.
서구영화 속 동양인들은 왜 ‘블리치 염색’을 하고 있을까?
https://www.asiae.co.kr/article/2019040311225437985
이 앞에 헤지 펀드 매니저가 영혼이 흑화해서 일에만 빠져 있는데, 그 어두운 기운을 걷어내니까 일하던 모니터를 다 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사무실에서 즐겁게 뛰쳐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직장을 그만둘거면 먼저 보스에게 보고하고 2 현각 스님이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다가 하버드 종교학과를 들어간게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현각 스님은 1989년 봄 미국으로 돌아와 월스트리트에 있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그해 9월에는 로마 가톨릭의 신부가 되고자 하버드 대학 신학대학원 비교종교학과로 진학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8%84%EA%B0%81_(%EB%AF%B8%EA%B5%AD)
월스트리트의 사나움은 예전에 영주 닐슨님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전화 거래를 하다가 전화기를 부수는 일도 있다고 하니, 현각 스님처럼 일하다가 현타가 와서 갑자기 그만두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엔 옆자리 트레이더들에게 ‘또 뭐야’란 반응이 나올 정도로 목소리가 높아지다가, 어느 순간 전화기에 대고 있는 욕을 퍼붓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거래가 더 과열되거나 협상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결렬됐을 때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를 끊다 못해 아예 들고 있던 전화기를 부수는 트레이더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자주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벌어지는 일이기에 월스트리트 트레이더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런 풍경에도 점점 익숙해진다.
아마 월스트리트가 아닌 다른 직장에서 근무시간에 화가 난다고 전화기를 부숴 버렸다면 해고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10년 넘게 월스트리트에 있었지만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전화기를 부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영주 닐슨의 Wall Street Report]‘장외시장’은 마우스보다 전화로 통한다
그래서 헤지 펀드 매니저에게서 어두운 기운을 뽑아내니까 당장 그만둔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금융인들도 적당히 농담으로 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는 재즈 뮤지션조차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다고 보여준다. 돈이건 꿈이건, 그게 무엇이 됬던 그것에만 파묻히면 어느 가을 오후의 산들바람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엄마와 함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잔잔한 파도가 차갑게 발을 간지럽히는 감촉을 놓칠 수 있다. 삶의 소중함은 그런 사소한 것들에 깃들어있기도 하다.
나는 월스트리트에서 헷지 펀드 매니저로 일하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가능하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란다. 거기에서 삶을 찾으려면 직장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서는 타협이 불가능한 지점들이 생기고, 선택을 강요받는 경우가 생긴다. 이 영화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강요받는다. 재즈 뮤지션을 길을 걸을 것이냐, 아니면 이제 막 음악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 중학생들에게 밴드 음악을 더 가르칠 것이냐, 아니면 낮에는 선생님을 하고 밤에는 클럽에 나갈 것이냐, 아니면 그 둘 다 아닐 것이냐, 주인공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른다. 영화는 과감하게 그 결말을 생략한다. 쿠키 영상까지 다 챙겨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왜 보여주지 않는가? 아니 그게 아니라 보여주면 안된다. 주인공은 이럴수도 있고 저럴수도 있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뭘하던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
여담으로 영화 음악을 트렌트 레즈너가 맡았는데, 나름 기대했지만 역시나 전혀 존재감이 없는 음악을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자아가 없는 음악이니까 영화음악으로 잘 나가는 걸 수 있다. 이 영화에 우울증도 나오고 죽음도 나오니까 더 어두워도 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적당히 자제한 것 같다. 오히려 명상 음악에 가까웠다. 사실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이 곡 구성으로만 보면 명상 음악과 다를 바가 없으니, 디스토션을 줄이고 앰비언스를 올리면 충분히 명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재즈 피아노 부분은 트렌트 레즈너가 못하니까 존 배티스트가 맡았는데, 마침 얼마전에 TV 공연을 봤는데 정말 제멋대로 밝게 연주하는 분이었다. 아무리 재즈라지만 텐션을 과하게 넣는게 아닌가 싶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은 스타일이다. 텐션은 어두운 음악은 더 어둡게 만들고, 밝은 음악은 더 밝게 만든다. 거기에 그는 피아노도 가능하면 뚜껑을 열고 치는데 그만큼 피아노의 음량이 커진다. 거기에 힘도 좋아서 정말 세게 치기 때문에 그 밝음이 더 강조된다. 그는 스티브 콜베어 토크쇼에서 오랫동안 음악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존 배티스트는 마지막 엔딩 곡도 만들었는데, 토이스토리의 “You’ve got a friend in me” 같은 풍이다.
그리고 영혼이 “가프의 방”에서 성숙해서 “제리”의 인도로 지구로 내려간다는 설정이, 에반게리온에서 인용한 유대교의 생명의 나무 신화와 같다. 그래서 픽사 버전의 에반게리온을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22”가 “조”의 몸에 빙의해서 처음 몸을 움직일때 기우뚱하는 동작이, 마치 에반게리온에 처음 탑승한 신지 같다.
그 외에 남은 이야기들.
- 주인공 “조”가 사후세계에서 생전세계(태어나기 전의 세계)로 떨어질때 윤곽선, 집중선, SD 캐릭터에 과장된 표정 같은 것들이 옛날 일본만화 같다.
- 사후세계에서 “이건 내 바다코끼리 꿈보다 더한걸”이라고 외국어로 말하는 영혼이 나오는데, 바다코끼리는 이누이트(에스키모) 문화와 관련이 많으니까 이누이트어이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누이트어를 몰라서 잘 모르겠다. 아니면 이것은 디즈니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왔던 “바다코끼리와 목수”의 인용일수도 있는데 안봐서 모르겠다.
- 풀밭에 떨어지는 것은 “미스터 빈”의 오프닝에서도 나오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 캐릭터 “제리”의 아트웍은 피카소의 큐비즘을 한붓그리기로 풀어낸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옛날 맥OS 로고 같기도 하다.
- “조”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좌절과 무의미함뿐인 것 같지만, 영화 후반부에 여기 나오는 인생의 좌절스러운 순간들에 사실은 약간의 즐거움이 있었다고 나온다. 예를 들어서 지하철을 타고 시무룩하게 퇴근하는 모습도, 나중에 창 밖으로 노을이 지는 풍경을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혼자서 외롭게 식당에서 파이 한 조각을 먹는 모습도, 막상 한 입을 먹어보니 아주 맛있어하는 모습이 나온다. 중학교 밴드가 엉망으로 연주해서 좌절하지만, 열심히 가르치다보니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한 순간의 스냅샷이고, 어떤 부분을 하이라이트하냐에 따라 달라 보인다.
- 생전세계에서 영혼들이 성격을 부여받는데, 이것도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 인생의 설레임, 꿈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찾는 것이다. 그리고 캐릭터 “22”처럼 그런 설레임을 찾지 못하는 영혼도 있을 수 있다.
- 캐릭터 “22”는 대학교 4학년 취업 준비생의 나이로 보인다. 아니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22”로 젊은 나이를 상징할수도 있다. 이제 졸업반이고 세상에 나가는 것이 두려운 나이다. 그 불안함이 너무 커서 인생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뉴욕 맨하탄으로 던져졌을때, 시끄러운 소음과 복잡한 인파에 공황(패닉 어택)이 와서 구석에 숨는다. 이 공황을 달래주는 건 맛있는 피자의 냄새다.
- 영혼은 피자의 냄새를 맡을 수 없듯이, 생전세계에서는 감각의 즐거움을 미리 알 수 없다. 그것은 지구에 떨어진 이후에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생전에 찾았던 설레임이 전부가 아니고, 살아가면서 새로운 설레임을 추가로 찾을 수 있다.
- 그리고 피자는 치즈 피자와 페퍼로니 피자 2가지가 나온다.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2가지다. 코스트코 피자도 이 2가지밖에 없다. 이 중에서 페퍼로니 피자를 선택한다. 역시 미국인이다.
- 좁은 터널을 기어서 지나가면 다른 세계가 나오는 것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같다.
- 캐릭터 “Moonwind”는 “바론의 대모험”(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문차우즌 남작의 모험, 뮌히하우젠 남작)의 남작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가 모는 배의 닻이 평화의 상징이고, 돛의 천을 무지개색으로 염색한 것으로 보아 60년대 미국 히피 또한 인용한 것 같다.
- 엔딩 크레딧에 문화적 조언자들이 열 몇 명 나오는데, 아마도 흑인 문화, 유태교 신화 등을 그리면서 혹시 문화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부분도 조언해주지 않았을까 싶다. 상당히 인원이 많은 것으로 보아 디즈니/픽사 외부인은 물론 내부 직원들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많은 사람들이 제작 과정에서 “코드 리뷰”처럼 정기적으로 리뷰해준 게 아닐까 싶다. 최근 여성주의는 물론이고 인종, 종교 등 많은 문화적 맥락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자기 검열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자기 검열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한편, 표현을 고민함으로서 표현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기도 한다. 창작자로서 어려운 일이지만 받아들이고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 재즈 클럽 “하프 노트”는 “블루 노트”의 오마쥬로 보인다.
- 이 영화에는 우울증, 강박증, 공황이 나온다. 우울증은 세상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강박증은 무엇을 하는 것에 너무 파묻히는 것이고, 공황은 세상이 두려워서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을 영혼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영혼을 잃는 것은 금융 트레이딩에 너무 빠지는 것일수도 있고, 금속 탐지기로 돈이 되는 금속을 찾는 것일수도 있고, 테트리스 게임에 빠지는 것일수도 있고, 나아가 재즈 피아노 연주에 빠지는 것일수도 있다. 그것이 그 일에 완전히 몰입해서 무아의 경지에 빠지는 트랜스 상태, 몰입(flow)일수도 있고, 강박이 될수도 있다. 그 둘은 같은 공간에 나타난다. 어디까지가 몰입이고 강박인지는 영혼이 흑화하느냐에 달렸다.
- 생전세계에서 영혼이 성격을 부여받을때, 그것은 꼭 긍정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성격도 부여받을 수 있다. 그건 “제리”가 그냥 부여하는 것이다.
- “제리”가 “테리”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칭찬을 하는데, 그러면 “테리”는 쑥스러워하면서 좋아한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326호 별에 사는 허영심이 많은 남자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