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동안 극장에 잘 가지 않다가 오랜만에 갔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는 없었지만 그냥 집에서 경험하기 힘든 큰 음량과 큰 스크린으로 볼만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중년 여성 3분이 “그래도 생각보다는 재밌었네”라고 하셨다. 나도 동감했다. 기대 없이 본 것 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어려웠는데, 여기저기 땜질해서 적당히 볼만하게 만들었다. 이런 점이 훌륭하기도 했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에서 제일 실망스러웠던 점은 완다의 퇴장이었다. 지난번 “블랙 위도우”(2021)에서도 마블 여성 영웅은 첫 단독 영화가 마지막 영화였다. 이번에도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완다가 더 비중이 높아서, 사실상 완다가 주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렇게 첫 주연급으로 활약했더니 퇴장이라니. 그리고 마지막에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처음 등장하는 여성 영웅이 말을 걸면서 끝난다. 1회용 본드걸처럼 도구적으로 쓰이고 버려진다.
이런 비판을 예상했는지, 완다는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완다비전”(2021)으로 이미 주연을 시켜줬고, 이번 영화의 퇴장도 그 연장선 상에서 정중히 다뤄진다. 또한 그 퇴장을 트리거하는 역할도 남성이 아닌 어린 여성이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퇴장하는 것처럼 보여줬다. 비록 우리가 마블 영화에서 완다를 너무 일찍 퇴장시키지만, 그렇다고 너무 아쉽지 않도록 우리가 많은 배려를 했다,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현재 세계의 흑화한 완다가 자살해서 다른 세계의 평범한 완다를 지켰다. 그러면 닥터 스트레인지는?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의 흑화한 닥터 스트레인지를 현재 세계의 착한 닥터 스트레인지가 죽였다. 그러니까 쌤쌤이다. 나도 희생했고 너도 희생했다. 이것도 변명처럼 보였지만, 뭐 나름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죽은 영웅의 혈통을 이을 젊은 영웅이 등장했는데, 이런 패턴은 “로건”(2017) 같았다. 여성 히스패닉인 점도 동일했다. 다만 로건때는 그 혈통을 이은 로라가 1회성으로 쓰이고 버려졌는데, 이번 어메리칸 차베스도 그럴지 아닐지 모르겠다.
어메리칸 차베스는 혈통이 히스패닉인 것에 추가로, 레즈비언 어머니를 가지고, 가슴에 미국 국기를 무지개색으로 칠한 뱃지를 달고 다닌다.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뉘앙스였다. 물론 그 이상의 것은 없었고, 마치 유행하는 패션처럼 장식적으로 소비하는 정도였다. 좀 구차한 면은 있지만 무슨 뜻인지 알겠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서 불쾌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에 적당한 이유와 변명을 덕지덕지 붙여서 무마를 했다는 점이 대단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함이 있는 이야기가 아주 훌륭해지는 건 아니다. 그냥 적당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극장의 큰 음량과 큰 화면으로 즐길만한 오락거리였기때문에, 스토리가 누더기여도 그렇게까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흠잡을 데 없는 화려한 효과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그 빈칸을 빼곡하게 메웠다. 그래서 나름 만족스러웠다.
다만 내 아내는 아바타, 트랜스포머, 아이언맨3 같은 뻔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매우 지루해해서 나 혼자 봐야 했다. 마블 영화 중에서 지루해하지 않은 건 아이언맨1, 스파이더맨 홈커밍처럼 수다스럽고 재기발랄하고 일반적인 영웅물의 틀을 살짝 비트는 영화들이었다. 마블 영화가 흥행하기 시작한 지점도 그런 지점부터였다. 그때는 지루하지 않았다.
아내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캐릭터부터 싫어한다. 아시아 문화를 잘 모르는 미국 백인이 사이비 티벳 불교에서 힌트를 얻어서 오리엔탈리즘 관점으로 만들어낸 캐릭터 아닌가. 그래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1편부터 많은 변명거리가 들어갔다. 얄팍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 복잡한 설정이 들어갔고, 덕분에 스토리가 누더기가 됐다. 심지어는 티벳도 아니라 티벳 비슷한 무언가로 바꿔서 더욱 누더기가 됐다. 그렇게 땜질하는 점이 구질구질하긴 하다. 한계가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땜질이라도 잘 하는 점은 훌륭하다고 본다. 이정도도 못하는 제작사들이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블은 뭘 욕 먹을지 안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미리 회피할 줄 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마블이 이런 적당한 영화들을 크게 욕먹지 않으면서 꾸준히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