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님이 빌려줘서 읽었다. 영어 제목은 “The road less traveled”로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랑 비슷하다.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여러 환자들의 상담 사례를 소개하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살면서 영적(spiritual)인 성장을 할 수 있을지를 얘기한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책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기독교에서 기독교적인 색채를 빼고 영적인 부분, 예를 들면 사랑과 자기 규율(훈육, discipline)을 분리했다는 점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들으면 화가 날 법도 한데, 왜냐하면 내 필요에 따라서 세속적(secular)으로 일부만 취사선택한다는 건 종교의 온전성(integrity)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이라는 편리한 말로 맛있는 부분만 골라먹고 나머지는 버리는 셈이다.
사실 미국은 여전히 아주 독실한 종교 국가라서, 주류 사회에 편승하려면 기독교인이여야 하고, 아니면 불교던 이슬람교던 종교를 가지거나 적어도 불가지론자(agnostic)여야 한다. 무신론자(athesist)는 소수자로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야 한다.
1978년에 이 책이 미국에서 출판되었을때 화제가 된 이유가 이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적인 인간으로서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일부 받아들이고 살자는 메시지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기독교를 믿어야 할텐데, 그렇게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다니! 아직도 가야 할 길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쓸때만 해도 불교를 믿었지만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내 생각에 그는 영적인 의미로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교회를 가서 다정한 교인들을 만나고, 함께 찬송하고, 차분하게 설교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고, 공감하고, 기도하고 하는 활동이 정신적인 치유가 될 것이다. 비록 그렇게 독실하지 않아도,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더라도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고,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활동일 수 있다. 그런 나이롱 신자가 되는 개구멍을 뚫어준 것이 이 책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 다들 딱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암암리에 했던 일을 이 책은 명시적으로 논리를 갖춰서 설명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2012년 책 “바른 마음(Righteous mind)”의 저자 조너던 하이트(Jonathan Heidt)도 같은 해의 TED 강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영적”인 의미를 말했다. 강연을 시작할때 여러분 중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3% 정도였는데,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다수였다. 그만큼 미국인들에게 적어도 “영적”이라는 말은 저항감이 적은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독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의미가 있을테니 좋겠지만, 그렇다면 교회의 입장에서는 좋을까 나쁠까? 대체로 좋을 것이다. 어찌됬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늘어나는 것이고, 언젠가는 이 책의 저자처럼 기독교로 개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나는 잘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 나름대로 사랑과 평화를 온 세상에 뿌리고 싶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모두가 싸우지 않고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언제까지나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불가능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항상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글이 여기서 딱 끝나면 완결성이 있고 좋겠지만 내가 말이 많아서 사족이지만 조금 덧붙이자면) 도올 김용옥의 2012년 책 “사랑하지 말자”에서 그는 사랑이 동양 문화권에는 없던 서구적 가치라며, 사랑이라는 말에 너무 이것저것이 달라붙어있으니 그럴 바엔 차라리 사랑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거야 그냥 하는 얘기고, 굳이 사랑이라고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서로 아껴주고 배려해주면 된다, 결국 제대로 된 사랑을 하자는 얘기다. 김용옥도 기독교 관련해서 많은 책을 썼고 강연을 했고, 아마 위와 같은 논리로 자신을 넓은 의미의 영적인 기독교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