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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플럭스 TV판 (1991-1995)

이온 플럭스는 내가 중학교 때 투니버스에서 심야에 잠깐씩 봤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더티 페어 플래시와 이온 플럭스가 19금으로 비슷한 시기에 했었는데, 아직 19세가 아니었던 시절이라 약간 죄책감을 가지며 봤었다. 그게 간만에 생각나서 미국 공공 도서관에서 DVD를 빌려 봤다.

오랜만에 다시 본 느낌은 20여년 전 봤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약간 야하고 자극적인게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설명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일단 던지는 과감함이 좋았다. 그냥 “이게 뭐지? 왜 이러는 거지?” 하며 보다 보면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림이 좋았다. 피터 정은 도대체 요즘 뭐 하나 찾아보니 그냥 적당히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피터 정의 그림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밌다. 표현이 재밌다. 예를 들어 맨 앞의 타이틀에서 속눈썹에 파리가 걸린다던지 하는 표현 말이다. 텅 빈 눈알의 시체에 파리가 꼬이는 줄 알았는데, 마치 식충식물에 파리가 잡히듯이 갑자기 눈동자가 굴러나오면서 확 잡아채는 느낌이 기괴하면서 좋았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DVD의 코멘터리와 각종 스페셜 피쳐를 보았으나, 피터 정은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단지 그 당시 그림을 그리던 니켈로디언의 러그래츠가 너무 지루해서, 그와 반대되는 뭔가를 그리고 싶어했다. 마침 MTV에서 이상한 인디 애니메이션 단편들을 모아서 방송하던 리퀴드 텔레비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여성 스파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그래서 러그래츠와 가장 반대되는 방향으로 만든 것이 이온 플럭스였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혼자서 다 그렸고, 사운드 엔지니어 한 명만 붙어서 2명이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운드의 비중이 매우 높았고, 대사도 없었다. 그런데 혼자 그린 것 치고 그림이 너무 좋았다. 마치 그래픽 노벨의 한 컷 한 컷을 그대로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것 같았다. 프레임은 많지 않았지만 정말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없었던 이상한 구도, 포즈, 캐릭터가 나왔다. 피터 정은 오히려 액션은 러그래츠에서 맨날 하던 거라 쉬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액션 장면은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캐릭터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은 평소 하던 게 아니라 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도 일반적인 캐릭터와 반대로 가다보니, 2020년인 요즘에 봐도 시대에 뒤쳐지는 느낌이 없다. 어리지 않고, 키가 크고, 중년의 목소리에, 차갑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단독으로 움직이고, 선도 악도 아니고, 몸매가 날씬하기보다는 비쩍 말라서 거미처럼 움직이는 캐릭터. 정말 이상한 캐릭터다.

조금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시즌 1과 시즌 2까지만 해도 5분짜리 단편이라 피터 정이 단독으로 작업해서 아주 좋았는데, 이것을 시즌 3에서 30분짜리 시리즈로 만들다보니 피터 정의 색깔이 옅어져서 별로였다. 더 나아가 영화까지 가면 피터 정의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피터 정의 이온 플럭스 이후의 행보가 영리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여러 모로 아쉬웠다.

예를 들어 시즌 3의 마지막 10화, End Sinister (악의 종말) 같은 경우 성경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는데, 인용을 너무 직접적으로 해서 재미가 없었다. 이온 플럭스는 클리셰를 깨는 재미가 좋았고, 항상 반대로 가다보니 어떻게 보면 반성경적인 맥락이 있었는데, 이렇게 마지막 10편에서 갑자기 성경의 맥락으로 돌아가니까 뜬금이 없었다.

By xacdo

Kyungwoo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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