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무라카미 하루키

https://brunch.co.kr/@drillmasteer/1155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이번 글은 망한 것 같다. 글의 호흡이 자주 끊겨서 술술 읽히지 않는다. 문장이 턱턱 막히니까 읽는 재미가 없다.

그런데 원래 잡지에 실었던 글을 보니까 그건 또 매끄럽게 읽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다. 그걸 고쳐서 책으로 낸 게 문제였다. 아니 도대체 뭘 어떻게 고쳤길래 그랬을까?

책 버전은 잡지 버전보다 3배 느리게 진행된다. 같은 이야기지만 세부 설명이 많아졌다. 그래서 잡지 버전은 단호했지만, 책 버전은 산만했다. 예를 들어 잡지 버전에서 아버지는 전쟁에서 중국 군인의 목을 벤 잔인무도한 사람이었으나, 책 버전에서는 비록 그런 아버지라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군대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있었어도 엄청나게 대단한 군인도 아니었다고 추가로 묘사한다. 이 잔인무도함과 평범함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이걸 의도했다고 하기에는 글의 전개가 너무 갑작스럽다.

그리고 잡지 버전은 흐름이 빨라서, 고양이와 아버지의 대비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 대비가 현재 나에게 이어지면서 아스라이 흐릿해지며 끝난다. 전형적인 하루키 스타일이다. 그런데 책 버전에서는 이런 선명성을 버리고, 구질구질한 현실의 디테일들을 잔뜩 부연해서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독자에게 여지를 남기는 아스라한 결말 대신에, 뭔가 정확한 메시지를 꾹꾹 눌러 써서 끝냈다. 하루키가 이렇게까지 메시지를 담으려 했던 적이 있었나? 하루키의 글은 그냥 제시하고 관조하는게 미덕이었는데.

무엇이 하루키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https://brunch.co.kr/@drillmasteer/625

노벨 문학상 때문이었을까? 일단 요즘 노벨상은 성과로 주지 않는다. 성과가 커도 이미 권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잘 주지 않는다. 성과에 비해 권위가 부족한 사람에게 줘야 노벨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격차가 있어야, 놀라움이 있어야 노벨상이 뉴스에도 나오고 하지 않겠나. 뻔하면 정보값이 없으니. 그리고 그래야 노벨상의 권위도 올라갈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미 권위가 충분하기 때문에, 글을 아무리 잘 써도 노벨상을 받기 어렵다. 노벨상을 줘봤자, 그래, 받을만한 사람이 받았군, 하고 넘어갈 것이다. 노벨상을 주는 의미가 없다. (고은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하루키가 노벨상을 받을 방법은 없을까?

아니면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글을 쓸 수 있다. 유태인으로서 홀로코스트를 비판하거나, 중국인으로서 중국의 독재정치를 비판하거나, 미국인으로서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웨덴의 진보적인 정치성향에 잘 맞는 글을 쓰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비판한 작품이라면, 노벨상을 줌으로서 일본에 정치적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요즘 들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앞으로 전쟁을 또 할 것 같은 태도를 비판했다. 나도 일본이 앞으로 전쟁을 안 했으면 좋겠고, 그러는데 노벨상의 권위를 빌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루키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하루키는 이미 “언더그라운드”에서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 옴진리교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그 소외된 슬픔들을 아카이빙한 것이었다. 이 책도 정말 재미가 없었지만 나름의 의미는 있었다. 일본 언론들이 가해자 입장에서만 보도하고, 피해자들을 너무 전형적으로 피해자화(victimize)하니까, 하루키가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피해자들이라고 다 전형적인게 아니라, 각자의 사정이 다르고 슬픔의 모습도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에 노벨상을 주기에는 부족했다. 일단 아카이빙에 불과해서 문학적인 가치가 부족했다. 그리고 이것으로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움직임이 생기기가 어려웠다. 이런 사이비 종교 문제는 정치적으로 풀기가 참 어렵다.

그럼 난징 대학살은 어떨까? 하루키가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묘사한 적은 많았지만, 하루키의 소설이 늘 그렇듯이 어떤 메시지를 담지는 않았다. 전쟁을 반대한다는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노벨상을 받을만할텐데 말이다. 물론 하루키가 굳이 노벨상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 그냥 더 늙기 전에 일본에 좋은 일 한 번 하겠다는 봉사활동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전쟁에 참가했었고, 거기에 직접 중국 군인의 목을 베었다는 얘기에서 뭔가 풀어낼수도 있었을 것 같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이야기가 안 만들어진다. 나머지를 뭘로 채울까가 문제였을 것이다. 그걸 고양이를 버린 이야기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처음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제목을 보고, 정말 하루키의 점잖은 분노를 느꼈다. 하루키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고양이를 버린 적이 있었다니. 그 사건이 말해주는 바가 심상치 않았다.

하루키는 나름 명문 대학교인 와세다 대학을 다녔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자를 사귀어서 결혼하고, 졸업하기도 전에 재즈 바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도 가지지 않겠다고 했다.

심지어 하루키는 그 후 재즈바를 정리하고 일본을 떠나서, 아내와 단 둘이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여행기 “먼 북소리”에 나온다. 일본과의 연락을 끊고, 유럽 각 지역마다 한 달 이상 머무르지 않으며 계속 여행하며 소설을 썼다. 왜 그렇게까지 일본에서 도피해야 했을까?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해서 공감이 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를 좋아하고, 재즈를 좋아해서 재즈 바를 차리고, 자유 연애를 하고, 소설을 쓰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고양이를 버리는 사람이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과 고양이를 버리는 사람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글은 그 차이에 대한 글이었을까? 그러기보다는 나와 다른 아버지를 이해하고, 혈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글이었다. 고양이를 버린 것도 그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달리, 고양이를 버린 것에 대한 분노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까지는 잡지 버전에 있었으나, “계승”은 잡지 버전에 없었다. 이 “계승”을 추가하느라 책 버전이 길어졌다. 내 아내는 이 부분을 특히 싫어했다. 왜 아들은 끝까지 아버지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보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흥미로웠다.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상당히 길고 그리고 처절한 얘기가 될 테니까. 결론만 말하면,” “이십 년 이상 전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고,” “나는 예순 가까운 나이였고, 아버지는 아흔 살” “아버지와 나는 — 그의 인생 마지막의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아버지를 줄곧 실망시켰다, 기대를 저버렸다 하는 기분을 — 또는 그 잔재 같은 것을 — 품고 있다”고 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인정 욕구가 승화되지 못하고 계승의 형태로 변한 것 같았다.

트위터의 벤더님이 사주로 볼 때 집안에 충돌, 파괴가 일어날 확률이 대략 1/3이라고 계산했다. 생각보다 높은 확률이다. 이런게 특별하지 않다는 점이 나에게 위안이 됐다. 하루키도 이 글에서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 그 의도가 비록 실패한 것 같지만, 여전히 집착의 굴레를 벗지 못해서 구질구질하게 부연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적어도 시도는 했다는 의의는 있을 것이다.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19/10/07/abandoning-a-cat

Published
Categorized as xacdo

By xacdo

Kyungwoo Hyun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