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유행하는 어려운 말들을 영어로 하면 다음과 같다.
핍진성 verisimilitude
핍진성은 애초에 verisimilitude의 번역어다. 이것의 형용사형은 verisimiliar로 마치 very similar처럼 들린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같다는 것이다. 주로 문학, 영화 등을 평론할 때 쓰는 말인데, 묘사나 내용이 너무 현실과 달라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면 핍진성이 없다고 한다. 반면에 정말 진짜 현실같이 그럴싸하게 표현하면 핍진성이 있다고 한다.
핍진성이 없으면 “이게 도대체 뭐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꿈을 깨듯이 가상의 작품 세계에서 깨버리는 느낌이 든다.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도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핍진성은 진정성(authenticity)과는 약간 다르다. 핍진성이 작품의 그럴듯함이라면, 진정성은 작가의 태도다. 이 작품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바치는 느낌이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절실한 마음으로 전력을 다 하는 태도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핍진성이던 진정성이던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핍진성과 진정성이 없어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핍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많이 취재하고 탐구해야 하는데, 이러면 내가 지금 기사 또는 논문을 읽는 건지 소설을 읽는 건지 모호해지기도 한다. 또한 진정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과 삶의 균형을 포기하고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러면 작품이 절박해지고 박진감이 넘치고 힘이 넘치지만,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핍진성, 진정성은 너무 품질이 떨어지는 작품, 작가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하지만 나는 핍진성이나 진정성이 없어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작품인데, 현실이 뭐가 중요한가. 아니면 꼭 절실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2차 가해 revictimize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상황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피해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을 2차 가해라고 한다. 한국어는 가해를 2번 하는 걸 강조했는데, 영어는 피해를 2번 받는 걸 강조해서 재-피해자화 라고 표현한다.
이 단어는 주로 인권운동에서 쓴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힘이 약하다던지, 성다수자에 비해 성소수자의 힘이 약하다던지 할 때, 힘이 강한 쪽 보다는 힘이 약한 쪽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세상이 힘의 논리로만 움직인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을까. 약한 사람도 보호해서 더 넓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인간적이기도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도 더 발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물론 피해자가 100% 결백하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가해자도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은, 그런 판단을 하지 말고 보호하는 것 부터 시작하자. 잘잘못은, 시시비비는 나중에 따지자. 나는 짧은 신문 기사나 인터넷에 떠도는 말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 판단은 판사라던가 조사위원회라던가 하는 전문적인 분에게 맡기고 싶다. 그런 결과가 나올때까지 나는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그래야 2차 가해 또는 2차 피해가 없을 것이다.
시혜적 patronizing
시혜적은 상당히 미묘한 단어다. 좋은 일을 했지만, 마치 높은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특별한 혜택을 베풀듯이 거만한 태도로 베풀었을 때 시혜적이라고 한다. 영어로 하자면 후견인으로서 후원하는 뜻의 patronize를 쓰는데, 여기에 약간의 비하적인 의미가 있어서 비슷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시혜적이라는 말에 완전히 대응하지는 않는다. 미국은 기본적으로는 뭔가 후원을 해 주는 것 자체가 너무 좋은 일이어서, 다소 비하적인 의미가 있어도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시혜적이라는 말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 태도 및 마음까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야 쓸 수 있는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인 미국에서 이렇게까지 생각하려면 인권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삼성에서 기록적인 이익을 거뒀을 때,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해서 전체 이익의 10%를 전 직원에게 보너스로 지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것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아니라 이건희 개인의 베품으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시혜적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래서 삼성 인사팀에서는 그 말을 시혜적이 아니라 “감사적(As an appreciation)”이라고 정정하여 대응했다. 큰 이익을 거둔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일회성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것이었다. 시혜적이라는 말이 한 턱 쏘는 느낌이라면, 감사적이라는 말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느낌이었다.
부자들이 베푸는 것은 그 자체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여기에 시혜적이라는 말은 베풀지만 말고 한 번 더 생각해서 잘 베풀라고 하는 얘기다. 예를 들어서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아프리카 오지까지 위성 인터넷을 보급하는 internet.org 공익 사업을 하는데, 빌 게이츠가 이를 비판했던 적이 있다. 지금 당장 말라리아 백신이 없어서 죽어가는 곳에 인터넷을 보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비판이었다. 물론 IT를 보급하는 것은 좋지만, 캘리포니아에서 풍족하게 사는 부자의 입장에서 너무 가볍게 생각할만한 자선 사업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래서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을 자기 사업을 하듯이 중요하게 하고 있다.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당사자가 정말로 필요한 것을 잘 생각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도움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정말로 좋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약간 덧붙이자면, 시혜적이라는 말과 연관되는 말로 condescending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주로 미국 백인들이 기본적으로는 예의바른 가운데 약간씩 거들먹거리면서 잘난체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거나, 국경없는 의사회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하면서 대단한 척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아주 미묘한 지점이다. 미국이 워낙 과시적인 걸 좋아해서 적당히 넘어가주는 경우가 많지만, 아주 민감한 경우에는 약간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야 워낙 나대는 걸 싫어해서 기본적으로 겸손을 탑재하고, 기부도 몰래 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은 기부도 티나게 과시적으로 하고 이를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이지만, 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기본적으로는 같은 사람인지라 아주 약간 마음이 상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래서 너무 거들먹거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작작 하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