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7일에 니가 썼던 편지를 한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받아봤다. 지난주 외출에서 만났을때 너는 이 편지를 읽은 줄 알고 만났겠지. 하지만 난 아니었어. 그래서 이제야 받아 본 니 편지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화가 났다. 정말 편지를 읽고 이렇게 화가 난 건 처음이야. 그래서 편지를 쓴다.
*52div의 근황
니가 간 후로 52div는 문을 닫았다. 덕분에 나는 너 뿐만이 아니라 52div에서 만나던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졌어. 그래서 나는 이제 니가 전역했으니 아무 때나 만나고 연락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넌 핸드폰도 안 사고 연락을 끊고 재수를 한다니. 난 외박 때마다 너 만나서 놀고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다. 그래서 많이 아쉽다.
*"나의 그림자는 일병 때 이미 죽었어"
하지만 화가 나나 이유는 너와 연락을 못하게 돼서라기보다, 군생활 말년의 처절한 비명 때문이었다. 충격적인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새로 생겨버린 자아와, 전역을 앞에 두고 돌아오고 있는 기존의 자아. 이 두 개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고 했지. 나는 니가 언제나 밝고 명랑하게, 힘들지만 굳세게 군생활을 해 온줄 알았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약한 소리를 하다니.
*나의 경우
나는 군대에 오면 내가 엄청나게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어. 요즘 군대가 예전처럼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바꿔야 될 정도로 힘들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하긴 22년이나 잘 버텨온 지금의 모습을 다섯달의 군생활도 바꾸기가 힘든 탓도 있겠지. 전에 니가 말했듯이 난 군생활에 빠지지 않았고 군생활을 잘 해보겠다는 의지나 관심도 별로 없어. 그저 나는 오늘이 4월 20일이구나. 오늘 김진표베스트앨범 나오는 날인데, 패닉 내년에 재결합한다는데 어떻게 되려나. 애인 5권은 나왔을까. 같은 것에 관심이 있어. 요즘 위에서 갈궈대서 죽겠다. 태권도가 힘들다. 유격이 다가온다. 같은 건 별 신경도 안 써. 난 점점 군대 안에서 예전의 내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사회에서 공부하던 컴퓨터책을 전산실에 갔다 놨어. 무지하게 두꺼운거 여섯권을. 그리고 만화책은 안되지만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 카툰 "새댁 요코짱의 한국살이" 같은 책을 가져오고. 케미컬 브라더스 베스트 앨범에. 군생활에 예전 내 모습을 어떻게든 끌어오려고 노력하고 있다. 즉 나는 군생활 속에서도 에전 모습을 찾으려고 하고 있어. 그래서 설령 군생활로 내가 변하다 하더라도 에전 모습을 기반으로 한 것이겠지. 변한다 하더라도 전역하면 금방 후회없이 돌아와 버릴꺼야. 그런 확신이 있다.
*너의 경우
나는 모르겠다. 예전 니 모습을 찾을지, 안니면 군대 모습을 유지할지. 그야 난 니가 군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모르잖아. 얼마나 꼽창이엇을지, 아니면 얼마나 갈굼을 받았을지 나는 모르겠다. 하여간에 중요한건 니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맘을 먹던지 아니면 군대 모습을 유지하려고 맘먹던지에 상관없이, 분명히 너는 변했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꺼야. 앞으로 나아가기 싫어도 살아있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밖에 없는게 인간의 삶이니까. 나도 그럴테고. 물론 나야 그다지 변하지 않을거란 확신이 있지만 그건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살겠다는 계획일뿐, 현재의 나에 대한 보증은 아니다. 설령 변하더라도 예전의 모습을 향해 살겠다는 일종의 다짐 같은 거지. 내 생각은 어차피 상관없다면 그러려니 하고 사는게 났다는 쪽이다. 체념에 가까운 무신경함이지. 뭐가 좋은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도 너에게 조언을 할만한 입장은 아니지만, 니 편지를 보고 화가 난 탓인지 말이 막 나온 것 같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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